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마즈 요시히로 (문단 편집)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 일본으로 살아돌아왔지만, [[사쓰마]] 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시마즈는 규슈 통일전쟁을 하는 동안 얻었던 땅을 토해내고 규슈 남부의 사쓰마, 휴가, 오스미 3국만을 인정받게 되는데 히데요시의 이간책으로 휴가는 요시히로에게, 오스미는 히데요시와 협상을 이끈 이주인 타다무네에게 주어졌다. 임진왜란에서도 다른 영지가 그렇듯 원하지 않았음에도 히데요시의 징병 압박에 시달렸고,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파병에 반대한 [[시마즈 요시히사]]와 히데요시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요시히로간의 반목도 시작된다. 또한 1599년에 이주인 타다무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 미리 제거했고, 이 때문에 그의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가 처음 병사를 이끌고 간 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시미성 방어 지원요청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군을 동원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해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해 버렸고, 후시미 성주 [[토리이 모토타다]]는 요시히로의 모반을 두려워해 입성을 거부한다. 천하의 정세가 정해지는 이 싸움에 참여해서 명분을 쌓고 이기면 콩고물을 얻어먹을 계획으로 그리고 오사카 성에 인질이 있어서 서군에 참가하기로 한다. 그래서 시마즈는 전투 내내 적극적이지도 않고 방관한다. 그러면서 본국에 지원요청을 하지만 요시히사는 들어주지 않았고, [[시마즈 토요히사]] 등 수 백여명만이 가문의 뜻과는 별개로 각자 요시히로를 위해 달려와 줬다. 이렇게 모인 시마즈군의 규모가 약간씩 다른데 이 때문일 것이다. 보통 1500~1600명 정도로 본다. 이에 대해 요시히사가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노량 해전 때 입은 피해 때문에 처음부터 병력 동원이 힘들었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전투에서 시마즈군은 본진의 서쪽에 위치해 비교적 최전선에 있었지만 침묵한다. 초반에 [[우키타 히데이에]]가 분전해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일시 패퇴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미쓰나리가 참전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자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했다는 게 군법에 어긋나고 시마즈를 모욕했다면서 죽이려고 달려들 정도였다.[* 현대의 기준은 물론 그 때 당시의 기준으로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참전을 거부한 것이다. 애초에 싸울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 전황이 밀리자 미쓰나리가 직접 와서 부탁했지만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라고 대답했고, 계속 요청을 무시한다. 나중에 우키타 부대가 패퇴할 때는 자기네 구역을 지나서 퇴각하자 사격을 가해서 '''자기 편에게 총쏘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도 먹었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이 동군으로 배신, 서군은 패주하게 된다. 동군은 서군 본진으로 밀고 나가면서 시마즈군의 퇴로가 끊겼고, 시마즈군도 공격받게 되었다. [[파일:external/indoor-mama.cocolog-nifty.com/sekigaharafuzin14h.jpg]]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결을 결심했지만,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가 설득해서 막는다. 다이묘인 대장이 죽는 것은 사쓰마는 물론이고 당시 일본에서 절대 막아야 할 일이었다. 이에 시마즈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시히로만은 탈출시킨다는 결론을 내리고 퇴각을 결심한다. 문제는 퇴로가 끊겼고 후퇴하려고 해도 앞 뒤로 도쿠가와 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것. 후방은 산이 가로막혔고, 거기에 사쓰마로 돌아가더라도 오사카에 있는 인질들도 구해서 가야 했기에 빠르게 가야 했다. 이에 시마즈군은 적진을 돌파해서 이세 로(路)를 통해 귀환환다는, 앞으로 퇴각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적이 대부분 서군 본진에 가 있기에 의외로 전방이 병력의 밀도가 낮았던 점도 고려됐을 것이고 전쟁광 이미지인 시마즈군 특유의 정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마즈군은 깃발을 버리고 부대표식을 부러뜨린 후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어 징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동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를 [[시마즈의 퇴각]]이라고 부르게 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들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공격을 상대하지 않았고, 차츰 동군 본진으로 오자 [[혼다 타다카츠]]와 [[이이 나오마사]]는 이들을 포위하려 하였다. 이 때 시마즈군이 쓴 전술이 바로 가문 고유의 진법 스테가마리(捨て奸)였다. 본진이 도주하는 동안 수 명의 팀으로 나눈 저격수가 후미에 남아 추격해오는 적 부대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저격 후에는 총을 버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시간을 번다(이하 반복)는 진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간벌기로 투입된 병사는 전사가 확실하기 때문에 인망이 없는 지휘관은 절대로 쓸 수 없는 전술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이 진법을 쓰는 와중에 이에야스의 본진 옆을 지나치기도 했다. 이 때 부하에게 '''"시마즈 요시히로, 이번에 뜻하지 않게 적이 되어 싸우다가 지금 막 진 앞을 지나 본국 사쓰마로 돌아가옵니다. 내 마음에 대해선 훗날 바로 말씀 올릴 것 이외다."'''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와 가신 [[쵸주인 모리아츠]]가 요시히로의 갑옷을 입고 카게무샤 역할을 하였다. 둘 다 전사했고, 모리아츠는 죽기 직전까지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여기 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적지에서 벗어났을 때, 병력은 50 ~ 8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도쿠가와 측에서는 이들을 막던 [[이이 나오마사]]가 저격당했고, 2년 후 상처가 악화돼 병사한다. 또한 나오마사의 사위로 함께 첫출전했던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이에야스의 4남. 도쿠가와 씨가 아닌 마츠다이라 씨를 계승.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원래는 마츠다이라 씨였다.]도 저격당해서 나오마사가 죽은 후 얼마 안 돼 병사한다. 그리고 이들의 목숨을 바쳐서 요시히로는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이세로를 따라 이가성을 지나 오사카로 가서 인질을 구출했고, 세토 내해를 가로질러서 영지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도망가던 중에 같은 서군 소속인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만난다. 무네시게의 친부 [[타카하시 쇼운]]이 위에 언급되었듯 시마즈 가문과의 전투에서 죽었기 때문에 무네시게가 복수를 생각한다면 80명밖에 없는 시마즈군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일전의 은원관계는 잊은지 오래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규슈로 갑시다'라며 대인배다운 태도를 보여 요시히로는 크게 감격한다. 이후 영지로 돌아간 무네시게가 주변의 나베시마, 구로다, 가토 등의 동군 세력에게 협공당하자 은혜를 잊지 않은 요시히로는 지원군을 보내주기도 했다. 출두명령을 거부하고 계속하여 군비증강에 힘쓰는 사쓰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를 치기 위하여 큐슈의 다이묘들에게 '''사쓰마 토벌'''을 명하긴 하였으나 건재한 시마즈 가는 심히 부담이 되었고, 또한 싸움이 장기화 될 경우 각 다이묘들의 불만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1주일 만에 철회하게 된다. 시마즈 가문 또한, 원래부터 요시히로를 당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세키가하라의 참전은 요시히로의 독단이었지 시마즈 가문 전체의 뜻은 아니며 요시히로 본인도 오사카 성에 인질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기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싸운 게 아니다. 탈출할 때만 용감해서, 이에야스가 그냥 보내줬으면 양측 모두 피해를 입지도 않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1,600명만 동원할 만큼 그리 서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닌 만큼 용서해달라는 뉘앙스로 화의를 내비친다. 거기에 시마즈 가문 차원에서도 원래 요시히로가 지병으로 [[치매]]를 앓고 있다고 말했으며[*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보다도 일단 이렇게 우겨서 도쿠가와 가문에게 해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가문 내에서 돈을 들여 이 인간의 치매를 치료하고 있는 중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까지 말했다. 한마디로 제 정신이었으면 서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하는 발언이었다. 이 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였다는 것이 참 특이하다. 헌데 그걸 받아준 나오마사도 대인배인 듯하다. 결국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 1602년, 시마즈 가에 대한 처분은 불문에 붙이고 요시히로에 대해서도 일선에서 물러나고 막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결론이 내려지긴 했으나, 이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까지 마음에 두게 되어,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시신을 사쓰마쪽으로 향하게 묻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훨씬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결국 도쿠가와가 세운 에도 막부는 시마즈의 [[사쓰마 번]]이 주축이 되어 망하므로 예언이 된 셈이다.] 일단 요시히로는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에게 당주 자리를 물려주고 뒤로 물러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